'나이팅게일서 오월 엄마로'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초대 관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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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스1) 서충섭 기자 =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병원 간호사로서 다친 시민들을 치료하고 이후 '오월어머니' 대표로 관련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오월어머니집 초대 관장 안성례 여사가 28일 87세 일기로 별세했다.
안 여사는 1938년 11월 19일 함평 월야면 예덕리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예덕리는 당시 독립운동가를 은밀히 후원하던 안 씨 집성촌으로 안 여사도 어린 시절 그와 같은 사회의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안 여사는 6·25전쟁 중 소작농들의 허위 고발로 모친을 잃는 등 참상 속에서도 함평 월야초-광주 전남여중을 거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지금의 전남대 의과대 간호학과 전신인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남대 의대 병원에서 근무하다 1958년 전남대 영문학과 대학원생 명노근 씨를 만나 1년간 연애 후 1959년 결혼했다.
1964년부터는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며 수간호사 1년 생활 후 간호감독으로 승진했다. 1969년엔 자궁근종이 발병했으나 투병 생활 끝에 이겨내고 총 1남 4녀의 자녀를 얻었다.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린 지난 2020년 11월30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이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린 지난 2020년 11월30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이 '살인죄 처벌'이라는 문구를 목에 걸고 있다. 2020.11.30/뉴스1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안 여사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부터 안 여사가 있던 기독병원에도 부상자들이 실려 왔다. 피가 부족해지면서 병원 직원들도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기독병원 침상 500개가 부족할 정도로 부상자들이 몰려왔고 복도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밤새 중환자들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안 여사는 부상자를 위해 헌혈하러 온 고등학생 박금희 양이 헌혈 직후 총에 맞아 다시 병원으로 실려 온 광경을 목격했다.
5·18 이후에는 민주화 인사인 남편 명노근 전남대 교수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 전두환 군부가 명 교수를 김대중 전 대통령,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5·18 주동자로 지목하자 안 여사는 남편 석방을 위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투쟁했다. 이후 그는 광주·전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장을 맡아 민주화 인사 석방과 전두환 군부 타도 활동에 나섰다.
1991년에는 광주시의원에 당선돼 5·18특별위원장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피해자 보상 특별법 제정에 나서는 등 여성으로는 최초로 3선 시의원을 역임했다. 2001년에는 5·18로 가족이 희생되거나 다친 여성들이 모임 '오월여성충주출장샵회'를 설립했다. 오월여성회는 2006년 '오월어머니회'로 이름을 바꾸고 광주 동구 장동에 '오월어머니집'을 개관했다.
안 여사는 오월어머니집 초대 관장을 맡아 6년간 활동하며 보성출장샵'오월어머니상'을 제정하는 등 오월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했다.
안 여사 장례는 고인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광주 천지장례식장에서 치러진다. 발인은 30일 오전 11시 30분, 장지는 국립 5·18민주묘지다. 자녀로는 명윤석·혜원·규원·지원·진(광주시의회 교육문화위원장) 씨가 있다.
안 여사는 1938년 11월 19일 함평 월야면 예덕리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예덕리는 당시 독립운동가를 은밀히 후원하던 안 씨 집성촌으로 안 여사도 어린 시절 그와 같은 사회의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안 여사는 6·25전쟁 중 소작농들의 허위 고발로 모친을 잃는 등 참상 속에서도 함평 월야초-광주 전남여중을 거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지금의 전남대 의과대 간호학과 전신인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남대 의대 병원에서 근무하다 1958년 전남대 영문학과 대학원생 명노근 씨를 만나 1년간 연애 후 1959년 결혼했다.
1964년부터는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며 수간호사 1년 생활 후 간호감독으로 승진했다. 1969년엔 자궁근종이 발병했으나 투병 생활 끝에 이겨내고 총 1남 4녀의 자녀를 얻었다.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린 지난 2020년 11월30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이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린 지난 2020년 11월30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이 '살인죄 처벌'이라는 문구를 목에 걸고 있다. 2020.11.30/뉴스1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안 여사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부터 안 여사가 있던 기독병원에도 부상자들이 실려 왔다. 피가 부족해지면서 병원 직원들도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기독병원 침상 500개가 부족할 정도로 부상자들이 몰려왔고 복도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밤새 중환자들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안 여사는 부상자를 위해 헌혈하러 온 고등학생 박금희 양이 헌혈 직후 총에 맞아 다시 병원으로 실려 온 광경을 목격했다.
5·18 이후에는 민주화 인사인 남편 명노근 전남대 교수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 전두환 군부가 명 교수를 김대중 전 대통령,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5·18 주동자로 지목하자 안 여사는 남편 석방을 위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투쟁했다. 이후 그는 광주·전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장을 맡아 민주화 인사 석방과 전두환 군부 타도 활동에 나섰다.
1991년에는 광주시의원에 당선돼 5·18특별위원장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피해자 보상 특별법 제정에 나서는 등 여성으로는 최초로 3선 시의원을 역임했다. 2001년에는 5·18로 가족이 희생되거나 다친 여성들이 모임 '오월여성충주출장샵회'를 설립했다. 오월여성회는 2006년 '오월어머니회'로 이름을 바꾸고 광주 동구 장동에 '오월어머니집'을 개관했다.
안 여사는 오월어머니집 초대 관장을 맡아 6년간 활동하며 보성출장샵'오월어머니상'을 제정하는 등 오월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했다.
안 여사 장례는 고인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광주 천지장례식장에서 치러진다. 발인은 30일 오전 11시 30분, 장지는 국립 5·18민주묘지다. 자녀로는 명윤석·혜원·규원·지원·진(광주시의회 교육문화위원장)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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